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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경영

175억 흑자 기업은 왜 220억 앞에서 멈춰 섰나

by 박선영 2026. 6. 21.

지난해 영업이익 175억 원의 흑자를 낸 회사가 있다. 자산은 수조 원, 70년 역사의 메이저 언론사다. 그런데 이 회사는 220억 원짜리 어음 한 장을 막지 못해 부도가 났다.

장부만 보면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흑자 기업이 왜 망하는가. 하지만 현금경영(Cash Management)의 렌즈로 보면, 이것은 미스터리가 아니라 가장 전형적인 죽음의 방식이다. 우리는 이것을 흑자도산이라 부른다.

JTBC 206억 원 디폴트로 시작된 중앙그룹의 연쇄 위기지주사 중앙홀딩스를 포함한 5개 계열사의 회생절차 신청, 그리고 모태기업 중앙일보의 어음 부도와 워크아웃. 자산 규모로는 도무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거대 미디어 그룹이 어떻게 단돈 200억 원대의 만기 자금 앞에서 도미노처럼 쓰러졌는가.

이 글은 그 질문에 대한 현금경영 관점의 대답이다.

 

1. 시장의 진단은 정확하다. 그러나 절반만 맞다

신용평가사와 금융권이 내놓은 진단은 크게 두 갈래로 모인다.

첫째, 미디어 산업의 구조적 침체.

OTT와 유튜브가 시청자와 광고주를 동시에 가져가면서 전통 방송·신문의 수익 기반이 무너졌다. 여기에 코로나 이후 회복이 더딘 극장 사업까지 겹쳤다.

둘째, 계열사 간 재무 연계성으로 인한 신용위험의 전염.

한국기업평가는 이번 사태를 단순한 신용도 저하를 넘어 그룹의 재무위험이 법적 구조조정으로 현실화된 사건이라 평가했다. 한 계열사가 무너지자 신용등급이 연쇄 폭락했고, 지급보증과 자금보충약정으로 촘촘히 엮인 다른 계열사들까지 차환(롤오버)이 막히며 함께 침몰했다.

이 진단은 옳다. 다만 현금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현상이지원인이 아니다.

산업 침체는 방아쇠를 당겼을 뿐이다. 총은 이미 오래전에 장전되어 있었다. 미디어 시장이 좋았다 한들 단기 빚으로 장기 베팅을 거듭한 구조였다면, 위기는 시점만 늦춰졌을 뿐 어차피 왔을 것이다.

산업의 불황은 모든 기업을 똑같이 때린다. 그러나 같은 파도에 어떤 배는 가라앉고 어떤 배는 버틴다. 그 차이는 매출이 아니라, 배 안에 얼마나 현금을 실어두었느냐에서 갈린다.

시장은왜 지금 무너졌나를 설명한다. 현금경영은왜 무너질 수밖에 없었나를 설명한다.

 

2. 진짜 이유이익은 의견이고, 현금은 사실이다

중앙일보의 사례를 다시 보자.

지난해 영업이익 175억 원 흑자. 손익계산서는 양호했다. 그런데 계열사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차입금이 1분기 기준 4000억 원대로 불어났고, 한양증권이 보유한 220억 원 어음의 만기가 닥치자정확히는 신용등급 하락으로 기한이익상실(EOD) 조항이 발동해 원래 12·내년 3월이던 만기가 한순간에지금 당장으로 당겨지자회사는 갑자기 들이닥친 상환자금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익은 났지만 현금이 없었다. 이것이 흑자도산이다.

손익계산서의이익은 회계 규칙에 따라 계산된 의견이다. 매출로 잡혔어도 아직 통장에 들어오지 않은 돈이 있고, 비용으로 안 잡혔어도 곧 나갈 돈이 있다. 반면 현금흐름표의현금은 지금 이 순간 통장에 돈이 있느냐 없느냐 만을 따지는 사실이다.

기업은 적자가 나서 망하지 않는다. 갚아야 할 돈의 만기와 들어올 돈의 만기가 어긋나는 순간, 유동성이 바닥나는 순간 망한다.

중앙홀딩스의 부채비율은 이미 4500%를 넘나들었고, 그룹 총차입금은 2 8천억 원에 육박했다. 숫자는 오래전부터 비상벨을 울리고 있었다. 다만 흑자라는 장부가 그 소리를 덮고 있었을 뿐이다.

역사는 이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2008, 매출 3천억 원·영업이익 100억 원대를 기록하던 30년 업력의 코스닥 상장사우영이 단돈 91억 원의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 처리되고 그해 상장폐지됐다. 당시 이 회사의 유동비율은 117%로 겉보기엔 멀쩡했다. 그러나 유동자산의 60%가 현금화가 불투명한 재고였다. 장부상 자산은 충분했지만, 진짜 현금은 없었다. 17년이 지난 지금, 중앙일보는 같은 함정에 같은 방식으로 빠졌다.

3. 위기는 언제나 누적이다세 번의 결정적 실수

거대한 댐은 한 번의 충격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바늘구멍 같은 균열이 몇 년에 걸쳐 쌓이다가, 어느 날 마지막 물줄기에 터진다. 중앙그룹은 지난 수년간 현금경영의 관점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세 번 반복했다.

실수 ① — 단기 빚으로 장기 베팅을 했다

중앙그룹은 OTT 성장기에 콘텐츠 제작에 공격적으로 투자했고, 2026~2032년 올림픽과 2026~2030년 월드컵 중계권 확보에만 약 7000억 원을 쏟아부었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문제는 그 재원의 상당 부분이 내부에서 창출한 현금이 아니라 단기성·유동화 차입금이었다는 점이다.

회수에 수년이 걸리는 자산을, 1년 안에 갚아야 하는 돈으로 사는 것이것을 재무에서는 만기 불일치(maturity mismatch)라 부른다. 고금리 시대에 단기 빚으로 장기 투자를 하는 것은, 점잖게 말하면 도박이고 정확히 말하면 재무적 자살행위다. 중계권의 수익이 기대에 못 미친 순간, 빚은 그대로 남았다.

실수 ② — 계열사끼리피의 보증으로 서로를 묶었다

건강한 기업은 스스로 영업으로 현금을 만든다. 그러나 중앙그룹은 계열사 간 대여금, 지급보증, 자금보충약정을 촘촘히 엮어 한쪽의 구멍을 다른 쪽의 피로 메우는 내부 자금순환 구조에 의존했다. 중앙일보가 중앙홀딩스에 운영자금을 대고, 중앙홀딩스가 계열사들의 빚을 보증하는 식이었다.

이 구조의 치명적 결함은, 한 곳이 터지면 전체가 함께 몰살한다는 데 있다. 경영진 스스로 그 폭탄의 도화선을 서로의 발목에 묶어둔 셈이다. 금융권은 이 패턴을 낯설어하지 않는다. 2010년대 STX와 동양그룹의 연쇄 부도가 정확히 이 모양이었다내부 지원으로 돈이 돌다가, 한 매듭이 풀리자 네트워크 전체가 일시에 무너졌다.

실수 ③ — 최악을 대비한 현금 완충재(Cash Buffer)가 없었다

현금경영의 핵심 규칙은 단순하다. 위험이 감지되면, 자산을 팔아서라도 현금 실탄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는 것. 경고등은 작년부터 켜져 있었다. 신용등급이 내려앉고 금리가 치솟았다.

그런데 중앙그룹이 사옥 등 5500억 원 규모의 자산 유동화(세일 앤 리스백)를 본격 추진한 것은 이미 불이 붙은 뒤였다. 결과는 어땠나. 상당수 자산에 이미 담보가 설정되어 있었고 절차에 시간이 걸려, 당장의 자금난을 막지 못했다. 팔 수 있을 때 팔지 않고 만기 연장만 낙관하다, 정작 팔아야 할 때는 팔 수 없는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

위기 때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은, 위기 전에 미리 정리해 둔 자산뿐이다.

 

4. 정상화의 길목표는매출 회복이 아니라현금 확보

법원의 보호 아래 다시 살아남으려면, 구조조정의 프레임 자체를 바꿔야 한다. 지금 중앙그룹에 필요한 단 하나의 목적어는 매출도, 시청률도, 관객 수도 아니다. 오직 현금이다.

첫째, 돈이 되는 자산을 즉시 현금화해야 한다.

상징적 자산이든 미래 성장동력으로 아꼈던 지분이든, 지금 시장에서 현금이 된다면 팔아야 한다. JTBC가 자율구조조정지원(ARS) 프로그램을 신청해 채권자들과 협상 시간을 벌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핵심은 채권단에게 확실한 현금이 들어온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계열사 간 재무 방화벽(Firewall)을 세워야 한다.

이제 회생 절차를 오히려 기회로 삼아, 서로를 묶고 있는 지급보증의 사슬을 과감히 끊어야 한다. 독자 생존이 가능한 핵심 사업(방송·콘텐츠)과 그렇지 못한 한계 사업을 냉정하게 분리해서 살릴 수 있는 것만이라도 살리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함께 묶여 있으면 함께 가라앉는다.

셋째, 모든 평가 기준을 현금흐름으로 재정렬해야 한다.

앞으로 중앙그룹의 모든 사업부는 매출이나 시청률이 아니라 현금흐름(Free Cash Flow)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숫자의 언어를 이익에서 현금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체질 개선의 시작이다.

[결론] 규모는 결코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1997년 외환위기 때, 한보와 기아 같은 거대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졌을 때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장부만 보고 현금을 보지 않은 경영의 대가라고 평했다. 30년이 지났다. 중앙그룹 사태는 우리에게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교훈을 다시 던진다.

회사가 크다고 안전한 것이 아니다. 내일 아침 직원에게 줄 월급, 거래처에 결제할 대금, 만기 어음을 막을 현금이것이 없다면 그 기업은 규모와 무관하게 숨이 멎는다. 1인 출판사를 운영하든, 스타트업을 하든, 거대 미디어 그룹을 경영하든, 비즈니스의 절대 진리는 단 하나로 수렴한다.

현금 만이 생존을 보장한다.

그리고 이 차가운 사실 앞에서는, 70년 역사의 언론사도 예외가 아니다.

글 : 김성호(<현금경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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